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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길들이기를 자처한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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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길들여진 종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역설이지? “인간이 길들여졌다고?” 하나님께서 그러셨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길들였다면 “그럴 수 도 있겠네”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계를 만드셨다는 논거를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을 길들였다고 들이대도 뭐 딱히 변명할 문장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논쟁의 근원을 ‘그렇다’라고 차단해 버리니 사고의 확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길들여지기를 자처한 종(self domestication) ‘이라는 관점을 접하고 나면 사회를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이 인사이트는 허버드 대학의 인간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이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The Goodness Paradox)’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길들이다’는 표현의 사전적 의미는 “부려먹기 좋게 가르치다, 오래 매만져서 보기 좋거나 쓰기 좋게 만들다, 맞추어 익숙하게 하다”입니다. 인간이 길들여졌다는 것은 얌전해졌다는 것입니다. 폭력성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타적이 되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이런 특질 변화는 남성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불합리하다는 의식이 팽배해졌습니다. 요즘 사회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전보다 폭력이 많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신문지면과 뉴스를 차지하는 분노의 폭력들이 아직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던 싸움이 거의 없어진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젠 직접 싸우기보단 법과 제도를 통해 합의를 하고 해결해 내고 있습니다. 

대신 입장을 대변해주고 싸워주는 변호사나 보험사 직원을 글레디에이터와 같은 용병으로 고용하는 시대이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일상의 싸움이 현격히 줄어든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사고 중재를 하는 보험사 직원이 없다면 아마 도로 위에서 접촉사고가 나면 서로 싸우느라 난장판이 될 것이고 이로 인한 교통체증 또한 짜증 날 정도일 겁니다. 지금은 자동차 접촉사고 나면 경찰과 보험사에 상황을 알리면 가해자 피해자가 서로 얼굴 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합니다. 물론 돈이 들어가긴 하지만 말입니다. 싸움을 돈으로 해결하는 시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싸움으로 번져 폭력으로 물리적 해결이 되는 것보다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현명한 쪽으로 인간은 스스로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길들이기’는 관계입니다. 서로 길들이기를 통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없으면 서로 필요하지도 않은 사이가 되고 평범한 소년과 여우일 뿐이지만, 관계를 통해 길들이기가 되면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그래서 언제나 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행복을 알게 해 줍니다. 인문학 소설 속에도 ‘길들이기’는 이타적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 그리고 옆의 동료를 통해 길들여지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왜? 길들여지기는 이타적 행위로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인지했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과 제도를 만들어 폭력을 제어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형제도를 만들어 사회에서 통제할 수 없는 폭력자들을 제거해 냅니다. 사회가 점점 온순해져 갑니다. 힘을 믿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군사력으로 강제 침공을 해봐야 이젠 사회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폭력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비폭력적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아닌 경제력으로도 세상이 제어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물리적 폭력에서 경제적 폭력으로 형태만 바뀌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어려웠던 지난해가 그 어느 때보다 사회복지기금이 제일 많이 기부되었다는 것은 이타적 역설입니다. 인간은 이타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겁니다. 인류의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길들여지기는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는 윤활유와 같은 겁니다. 연인들의 길들여지기와 어린왕자의 길들여지기처럼 말입니다.

5 COMMENTS

  1. 길들여진다는 것은 이익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회가 불이익을 주고 내가 이익을 얻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익이 앞에 있기때문에 폭력이 교묘해지고 지능적이고 대규모로 가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것이 인간의 진화를 지속하는 이유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반면 언제나 길들여지는 약자는 퇴화하겠죠

    그럼 예수가 재림하려나요?

    결국 대칭성이고 , 브레인에서 작용하는 양자의 이중성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의 학자들은 예수의 영향을 받아(예수를 학문으로 접근한다는 뜻) 세상을 공사(plan)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사실이나 실체가 과거라면 plan는 PFC의 현재가 되고 M1의 미래이지만 미국 엘리트 사회가 공동으로 출력하면 미국과 세계의 생생한 현실이된다.

    미국 과학커뮤니티 오늘(21일) 기사 결론만 소개합니다

    집단지능은 사회화를 발달시켰지만 집단적 시스템을 관행적으로 배치시켜 문제 해결 능력을 떨어드리고 창의성을 저해시켜 

    인간의 결정적 약점이 될 수 있다

  2. 여러가지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길들이기’가 서로 유익하도록 ‘균형점’이 유지되려면, 사심없는 ‘깨끗한 마음’이 전제돼야 한다고 봐요.  
    이 선결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무슨 승천을 한대도 말짱 꽝이라는 것이죠. 
    관계에서 대칭성이 깨어지면, 각종 세계가 출현하지요. 
    불교에서는 ‘6도 윤회의 세계’라 하는 걸로 이해했습니다만. 
    이 시대는, 폭력이 더욱 교묘해져서 각종 사기꾼이 창궐하는 것 같아요. 피싱사기도 날로 진화하고, 
    합법을 가장한 법꾸라지들, 인권을 악용한 압박-간섭질, 그럴듯한 명분으로 왕따-경제제재 등… 인간이 사악하긴 하네요. 
    마음 하나 깨끗하면 극락이고 천국일 텐데. 그게 쉽지 않으니…! 
    • 폭력이 물리적 행위에서 비가시적 행위로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특이한 형질의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폭력의 감소는 이타적 인간을 바라보는 중요한

      바로미터라고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더 위험하고 힘들까요? 폭력을 바라보고 정의하는 일도 계속

      확장되고 있어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전체적인 폭력의 감소”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네요. 분쟁이나 내전 중인 나라가 꽤 많은 걸로 알아요. 

        국가 간의 전쟁도 경제전쟁 형태로 가다가 힘센 쪽에서 불리하면 무력을 쓰겠죠. 

        고통, 절망, 죽음으로 밀어넣는 것이면, 

        형태가 어떻든 그게 폭력 아닐까요?  

        • 폭력의 형태가 물리적에서 바가시적 형태로 변이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 격차로 인한 종속, 데이타 확보의 편차에서 오는 정보의 왜곡, 막연한 인종 혐오 등등 — 하지만 전통적으로 정의되던 폭력의 물리적 행위는 줄어든 것이 맞는듯 합니다. 동네 깡패나 건달들이 모두 없어진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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