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뇌과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입니다. 박문호교수님책을 통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름 개인적으로 뇌과학서적을 공부를 해왔습니다.
제가 뇌과학을 내린 결론은 사람의 모든 정신작용(마음 생각 감정 의지 양심 이성 지성 등)은 뇌의작용이며,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조선일보에 보니 서울대권준수교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뇌의 작용으로써
물질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마음을 다른말로하면 모든 정신작용으로 대체할수 있습니다. 저도 결론을 그렇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 김미선 역 갤리온 에서 나온 `뇌 과학의 함정`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고
제가 지금까지 기존에 알고있었던 뇌과학적지식이 많이 무너짐을 느꼈습니니다.
KBS 다큐 `마음`에서 나온 책 마음도 구입해서 읽었는데, 그 책도 사람의 마음은 뇌의작용이라고 분명 말하고
있는데, 뇌과학의 함정이란 책은 기존의 뇌과학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기존의 뇌과학을
사이비과학이라고 까지 이야기 하는것 같습니다.
박문호교수님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뇌과학의 함정 이라는 책을 알고 계시는지? 그 책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얼마만큼 수용을 해야하는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다른분들도 아시는 내용이 있으시면 도움을 바랍니다. 기존의 공부했던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이 강해서
많이 힘이듭니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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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의 함정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입니다. 참고하세요.
책소개
인지 과학의 주요 관념들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과 마음, 뇌와 자아를 둘러싼 현대 과학의 거짓과 환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현재의 뇌 과학으로는 인간에 대한 그 어떤 비밀도 밝혀낼 수 없다.' 이것은 2009년 뇌 과학계의 화제작으로 손꼽히며, 출간 즉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알바 노에가 『뇌 과학의 함정』에서 단언한 것이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와 연구 성과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사실상 지난 십여 년간 뇌 과학 및 신경과학이 인간에 관한 그 어떤 새로운 사실도 밝혀내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즉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밝혀내기 위해서는, 뇌를 이해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 뇌에 있는 뉴런들이 발화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기계론부터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철학의 성배라 일컬어지는 의식 자체를 곧 신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러 사례를 통해 저자는 거대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 책은 현대 과학의 철학적 빈곤과 그로 인해 야기된 인간에 대한 위험한 착각을 파헤치며, 의식-마음-자아의 비밀, 즉 인간의 본질에 대가서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소개
지은이 알바 노에(ALVA NOE)
철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이며 신경과학자이다. 현대 과학의 기본적 가정의 명백한 결함과 과학자들의 철학적 오류를 지적해, 의식-마음-자아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철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마음의 철학과 인지과학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독창적인 연구와 신선한 주장으로 늘 논쟁을 몰고 다니며, 저널과 매스컴을 비롯하여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예술철학, 분석철학, 현상학, 비트겐슈타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학 내 인지과학 및 뇌 과학 연구소와 뉴미디어센터의 연구원이기도 하다. <시각과 마음VISION AND MIND>을 공동 편집했고, 저서로 <지각에서의 행위ACTION IN PERCEPTION> 등이 있다.
서평 <뇌과학의 함정>
여기 글에 보면 기존의 뇌과학을 과학을 탈을쓴 사이비과학이라고 까지 이야기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지?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도움을 구합니다.
2009년 12월 30일(수)
심리학자 김태형
나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닫기』(2007, 세창출판사)에서 미국의 주류심리학을 비판하며 ‘가망 없는 미국 심리학자들’이라는 비관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말을 기꺼이 철회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 들어 심리학자를 비롯한 미국의 학자들 사이에서 기계론적 인간관, 실험맹신주의, 환원주의, 생물학주의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차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목소리가 미국의 주류 심리학계를 단번에 뒤엎을 정도로 크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미국 주류심리학이 안고 있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정당한 학문적 안티테제이고 진리를 향한 발걸음이므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큰 생명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미국의 주류심리학에 대한 비판서로 첫손에 꼽을 만한 저작은 2009년에 출간된 『뇌과학의 함정 : Out of Our Heads』(갤리온, 2009)이다. 이 책의 저자인 알바 노에(Alba Noe)는 심리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걸쳐 기존의 주류적 패러다임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대중을 오도하는 주류심리학
지금까지 미국의 주류심리학은 자신의 허점투성이 이론들을 ‘과학’이라는 포장지로 감싸왔을 뿐만 아니라 자본과 대중매체의 후원아래 그것으로 대중을 세뇌하는데 성공해왔다. 예컨대 노벨상 수상자인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놀라운 가설』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당신, 즉 당신의 기쁨과 슬픔, 기억과 야망, 개인적 정체성과 자유의지는 사실상 거대한 신경세포들의 연합체와 그에 관련된 분자들의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학주의자들은 사람의 모든 마음과 행동을 뇌(신경세포) 혹은 유전자의 문제로 단순화해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울증이나 게임중독 같은 정신장애들은 기본적으로 ‘뇌의 병’이라는 정신의학적 설명들 역시 너무나 당연시된다. 그래서 이제 대중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씨를 많이 뿌려야 하는 수컷의 동물적 본능 때문이며, 사람이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것은 뇌의 고장일 뿐이라는 설명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그야말로 “주류 신경과학자의 ‘놀라운 가설’이 이제 문화 전반의 통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뇌와 유전자 분야의 새로운 발견들에 계속 고무되어서인지 생물학주의자들은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뇌나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아도취적이고 오만한 태도까지 갖게 되었으며, 주류 학계에는 “과학과 철학의 성배인 의식조차 곧 신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는 언젠가는 다수에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지만, 그 시작에서부터 다수결로 채택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학계에서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회적으로 대세를 이룬다고 해서 미국 주류심리학의 주장이 자동적으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현미경 속의 세상에 갇혀있는 줄도 모르고 세상사에 통달한 것처럼 큰소리를 치고 있는 기존의 주류 학자들을 저자는 이렇게 꾸짖고 있다.
“십대들처럼, 신경과학은 과학기술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너무나 새롭고 흥분되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역사의식이 전혀 없다.”
기계론적 인간관 : 기계를 통해 사람을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기계론적 인간관이란 기계를 통해 사람을 보거나 이해하려는 견해와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17~18세기에 등장한 기계론적 인간관은 21세기인 현재까지 “신체조각, 뇌, 유전자의 순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해왔다. 최초의 기계론적 인간관은 기계문명의 급속한 발전에 감명을 받은 일부 철학자들이 사람을 복잡한 기계로 이해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람을 신체조각의 조립품으로 간주했던 최초의 기계론적 인간관은 너무나 조악했기에 그것은 뇌로 관심을 옮겨갔고, 컴퓨터가 발명되자 컴퓨터를 통해 뇌(혹은 정신)를 이해하려는 경향으로 발전했다.
컴퓨터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기계론자들은 뇌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에 그리고 마음은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며, 뇌는 컴퓨터처럼 정보처리를 담당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뇌는 정보처리 나아가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뇌는 물론이거니와 컴퓨터도 생각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손목시계에서 시간정보를 얻지만 손목시계는 지금이 몇 시인지를 모르듯이, 컴퓨터도 사실상 우리가 컴퓨터를 써서 수행하는 작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컴퓨터를 써서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다. 컴퓨터는 생각하지 않는다. 컴퓨터는 도구이다.”
컴퓨터의 정보처리나 연산 수행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오직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그날그날의 수입과 지출을 입력해 가계부를 만든다고 할 때, 그런 계산과정이나 결과는 오직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지 컴퓨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는 주체는 사람(나)이지 컴퓨터나 뇌가 아니며, “컴퓨터가 문제를 풀고 세계를 표상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컴퓨터가 마치 그렇게 하는 것처럼 취급한다는 사실에서 파생되는 능력”일 뿐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크나큰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뇌는 과학자도 아니고 탐정도 아니다. ··· 뇌는 관찰 가능한 망막의 상태를 발생시킨 먼 곳의 환경적 원인에 대한 추론은 고사하고, 어느 것에 관해서도 추론할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뇌가 정보처리 장치라는 개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한다는 것일까?”
저자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뇌가 하는 일은 우리를 위해 생각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은 옹호할 수 없고, 따라서 뇌가 복잡한 계산을 통해 이 과업을 해낸다는 생각도 옹호할 수 없다”고.
뇌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간단한 정신현상일지라도 그것을 유발하거나 주재하는 주체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 과학자들은 뇌의 시각세포 때문에 사람이 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계속해왔다.
과연 그럴까? MIT에서 므리강카 수르(Mriganka Sur)와 동료들이 흰 족제비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는 그들의 주장이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놓은 허구임을 보여준다. 수르의 연구팀은 “눈의 신경을 보통은 듣는 일에 사용되는 뇌의 부위로 연결했다.” 그러자 “흰 족제비는 청각 뇌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시각피질 안의 세포들을 시각세포로 만드는 것은 흰 족제비의 보려는 욕구이지 그 반대가 아님을 말해준다. 즉 유기체는 시각세포 덕분에 보는 게 아니라 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각세포를 발달시킨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모든 기능들 역시 뇌의 세포가 시켜서 가능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런 기능들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뇌의 세포가 발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시각능력을 뇌의 시각세포로, 청각능력을 청각세포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비과학적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기계론적 전통에 유전과학도 가세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유전자에 프로그램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이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은 착한 유전자 때문이고,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나쁜 유전자 때문이라는 식이다. 물론 유전자는 일정한 특성을 후대에 물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유전자가 생겨나고 그러한 유전자들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까닭일 것이다.
“후손에게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특성을 물려주는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일정한 유전자가 어떤 개체군 안에서 전파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 즉 어떤 유기체가 환경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물리학은 유기체나 환경의 존재를 목록에 넣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심리의 대부분 그리고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심리들은 뇌 혹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사람에게 고유한 인간심리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유기체의 생리적 비밀을 모두 파악하여 ‘사람에 대한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 육체’의 비밀을 담고 있는 유전자가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도 만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 하지만 사람의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내용 그 자체는 ‘사회적 존재’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사회적 존재로의 성장발전은 오직 사회 속에서만 가능하다.”(『스키너의 심리상자 닫기』, 173쪽)
기계론적 인간관의 가장 큰 맹점은 사람에 대한 연구에서 뇌와 유전자만 남겨놓고는 ‘사람과 세계를 배제’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사람과 세계를 상실한 뇌나 유전자에게 의미 있는 심리나 정신활동이란 존재할 수 없다.
“컴퓨터가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대체로 뇌가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의미 있는 사고는 환경과 역동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완전한 동물에게만 일어난다.”
그 어떤 것이든 기계론은 “마음은 머릿속의 사건들로부터 생긴다고 잘못 가정”한다. 그런 가정이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세계조차 뇌가 만들어낸다는, 즉 뇌가 있고 세계가 있다는 주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뇌가 있음으로 세계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있음으로 뇌의 정신현상이 존재한다. 이 문제에 대해 알바 노에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마음은 삶이다, 마음은 뇌의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 세계는 뇌 안에 만들어지거나 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 뇌 혼자서 무엇을 이룰 수 없기에 실상 모든 의미는 머릿속에 없다.”
마음의 경계를 뇌에 국한시킴으로써 마음을 뇌가 아닌 ‘전체로서의 사람’ 그리고 ‘세계’로 확대할 수 없게 하는, “개인의 내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접근법”이야말로 기계론의 가장 심각한 폐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뇌 과학이든, 유전과학이든, 넓은 범주의 생물학주의이든 그것은 정신에서 사람과 세계를 인위적으로 추방하는 비과학적인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만들어낸 기계에다 사람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그 발상의 무지함은 둘째 치더라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명체가 아닌 존재에게는 마음이 없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다. ··· 뇌에게는 마음이 없지만, 사람과 동물에게는 마음이 있다.”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도 육체적 생명만 가지고 있는 동물과는 달리 사회적 생명까지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생명체이다. 그리고 “의식의 문제는 다름 아닌 생명의 문제”이므로 인간심리는 사회역사 속의 사람을 연구함으로써만 비로소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주류심리학은 저자의 정당한 지적처럼 “의식이 없는 곳에서 의식을 찾아왔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심리학은 마음이 있는 곳에서 마음을 찾는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환원주의’ : 뇌로 환원되는 사람
마음은 뇌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지게 되고 발전시켜나게 되는 고차적인 정신현상이다. 그러므로 사회역사 속에서 생성되고 발전하는 인간심리를 생물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은 명백한 환원주의일 수밖에 없다. 즉 고차적인 현상을 저차적인 법칙으로 환원해 설명하는 것이 ‘환원주의’이므로, 사회역사를 배제하는 생물학주의적 심리학은 필연적으로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밥을 먹는 이유는 위장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뇌의 분노중추가 자극되었기 때문이며, 사람이 우울해지는 것은 뇌에서 우울증을 야기하는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황당한 주장이 심리학을 의연히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스키너의 심리상자 닫기』, 127쪽)
무지 때문일까?(현미경 속의 세계에 갇혀 사람과 세계를 보지 못하는 무지) 의도 때문일까?(제약회사의 이윤추구 목적에 부응하고 심리적 고통을 야기하는 사회모순을 보지 못하게끔 대중을 속이려는 의도)
그 원인이 무엇이든 환원주의는 심리학을 형편없는 비과학적 학문으로 전락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뇌의 작용 덕분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보는 일이 본질적으로 신경활동이 되는 것”은 아니며, “마음을 세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춤을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울증을 세로토닌 문제가 아니라 분자화학식으로 환원해 설명한다면 생물학주의자들은 벌컥 화를 낼 것이다. 생물학의 최소단위는 세포이므로 생물학적 현상을 분자화학식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이미 생물학이 아니고 물리학이나 화학일 뿐이라고 외치면서.
그렇다면 심리학의 최소단위는 무엇일까? 뇌 세포나 호르몬인가? 만일 그렇다면 심리학이 생물학과 다를 게 무엇인가?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심리학 연구의 최소단위는 뇌 세포나 호르몬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적어도 뇌의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해명하는데 의미가 있는 기초적인 정신현상이어야 한다. 나아가 그것은 마음속에 반영된 ‘나’와 ‘세계’를 반드시 포함해야만 한다. 즉 “의식(마음)의 이해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 내부의 신경을 향해, 즉 세포 수준의 작은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미시초점(microfocus)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바 노에는 마음 연구의 하한선을 ‘생명’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기초해 나는 만일 심리학이 동물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데 동의한다면, 심리학 연구의 하한선을 점차 ‘사회적 생명’으로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그리고 평생에 걸쳐 타인들을 포함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마음을 발달시킨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적인 세계, 사회적인 현실”을 접하면서 “구조화된 세계”에서 살아간다. 결코 뇌 안에 고립된 채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두개골을 넘어가며, 공유되는 사회·언어적 발판에서 지지를 얻는다.” 또한 “우리는 생각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며, 때때로 그 도구는 외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흔히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사회집단과 분리될 수 없으며, 사람의 숙명적인 존재방식이 사회역사적이므로 사회역사를 배제하고서는 절대로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정신현상을 뇌로 환원해 설명하는 환원주의자들은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뇌를 생각의 주체로 가정하고 있다. ‘착각을 했다고요? 그건 눈의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 맹점) 때문에 그래요.’, ‘우울하다고요? 그건 뇌의 세로토닌에 문제가 생겨서 그래요.’라는 식의 설명은 결국 뇌가 인지적 오류를 유발하고 정신장애에도 걸리게 만든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뇌가 내 안에 숨어 있는 어떤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이상 그것은 그 어떤 정신현상의 주체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우울하다’는 심리를 ‘내 뇌 속에 세로토닌이 부족하다’는 환원주의적 설명으로 대치하는 것은 심리학을 사회역사로부터 절연시킴으로써 그것을 생물학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학문적 정체성 파괴’만을 초래할 뿐이다. 정신장애와 뇌의 고장 사이에 상관관계만 발견되면 곧바로 뇌 고장이 장애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무지함과 비과학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뇌의 세로토닌 부족은 우울증의 생리적 기초는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우울증을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실제로 일반적으로 우울증의 원인은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있지 심술 맞은 뇌의 농간은 아니다.
인간심리를 뇌나 심장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런 설명은 사리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뇌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덕분”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비밀은 뇌 안이 아니라 뇌 밖에 있다. 지금까지 환원주의자들이 조금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그것을 틀린 장소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은 사람의 고차적인 정신현상을 억지스럽게 뇌로 환원할 게 아니라 사람과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즉 “심리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늑대소년의 육체적 기능을 연구하는데 있지 않다면, 환원주의는 사람을 연구하는 데서 절대적으로 배격해야 할 방법론이며, 심리학의 미래 또한 뇌 지도의 완성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스키너의 심리상자 닫기』, 174쪽)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마음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나와 세계의 관계”이므로 “나의 내부구조는 결코 혼자 힘으로 나의 정신상태에 의미와 관계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심리학을 비롯한 인문과학은 “세계가 우리의 기반”이며 “세계가 의미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학의 탈을 쓴 사이비 과학
주류 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철학의 영향도 받지 않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연구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철학은 본질적으로 세계관이고,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다. 즉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철학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철학이 필요 없다고 외쳤던 실증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실험을 통해 검증된 것만 믿는다는 식의 극단적인 경험주의적 세계관, 철학을 신봉하고 있다.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 역시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경생리학자들이 철학적 해석을 아무리 강하게 부인해도, 그들은 대부분 아직도 이원론의 영향 아래에 있다. 그들은 여전히 뇌가 마음의 자리라고 가정한다. ··· 데카르트의 이론보다 아주 조금 나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여전히 매사를 자극과 반응으로 양분하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상당수의 심리학자들이 자신의 암묵적인 철학적 배경을 애써 부인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철학적 배경이 올바르지 않다는데 있다. “자연과학은 독자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지도 않”을뿐 아니라 “최소한 주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식의 현대과학은 흔들리는 철학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다.” 즉 주류심리학은 기계론적 인간관, 환원주의적 방법론, 극단적인 경험론(실험맹신주의), 불가지론 같은 흔들리는 철학에 기초해 연구를 진행하고 세계를 해석한다.
이 중에서 극단적인 경험론의 아류인 실험맹신주의 문제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상당수의 주류심리학자들은 실험법의 의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심지어는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진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과학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역사적 존재인 사람을 연구하는데서 실험법은 하나의 연구방법 이상의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실험실에서는 기본적으로 “세계, 그리고 그것과 우리의 상호작용”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즉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실험실은 사람을 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
동물을 연구하는 주요한 방법 세 가지를 ‘뇌 연구’, ‘동물실험’, ‘자연상태에서의 관찰’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때 뇌 연구가 뇌 과학처럼 동물의 뇌를 미시적으로 철저하게 파고든다면, 동물실험은 실험실에다 동물을 집어넣고는 이런저런 가설을 검증해본다. 반면에 관찰은 동물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자연조건에서 긴 시간 동안 동물을 자세히 관찰한다. 누구라도 쉽게 짐작하겠지만 인류가 동물들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뇌 연구나 실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찰’에 의해 얻은 것이다. 즉 동물연구에서 기본은 뇌 연구나 실험이 아니라 자연상태에서의 과학적 관찰이다.
그러나 동물 중에서 가장 고차적인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심리학은 어이없게도 동물학자들과는 달리 자연상태에서의 관찰을 무척이나 홀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주류심리학은 뇌 연구나 실험법은 매우 중시하는 반면 사회역사(사람에게 있어서 자연상태란 사회역사적인 관계 속에서의 생활이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에는 거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편협하고 편향된 연구방법에 매몰되었기에 기존의 주류 심리학이 증명해온 사람은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뇌와 실험실 안에 갇혀있는 가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주류 심리학은 잘못된 철학적 토대와 그에 따른 편향된 연구방법론으로 인해 “그 모든 과학기술과 동물실험에도 불구하고 ··· 100년 동안 경험의 신경적 토대 파악에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실험실에 박제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알바 노에는 “달팽이를 현재의 달팽이로 만드는 것은 환경적 맥락에서 달팽이가 지나온 역사,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환경과의 역동적 교류다”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역사적 존재’라는 그의 명제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상식이지만 주류 심리학자들로서는 너무나도 배우기 힘든 명제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제도권의 주류심리학에 무비판적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 명제를 완강히 거부하는 철학으로부터 암묵적 세뇌를 당하게 되니까.
비록 화려한 과학적 외피를 쓴 채 현 시대를 풍미하고 있으나 주류심리학의 주장은 사이비 과학일 뿐이므로 차라리 그것은 독단과 맹신에 더 가깝다고 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뇌의 신경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과학자들이 알게 된 무언가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집에서 실험실로 가져온 선입견이다. 그것은 잘 확립된 이론에 속하지도 않고, 진실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명제의 범주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냥 편견일 뿐이다.”
심리학의 미래
최근에 인지과학자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은 자신의 감각만을 신봉하던 극단적인 경험주의를 넘어서서 사람은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즉 그들은 “뇌가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며 뇌는 뇌 자신의 개념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다”는 현대판 관념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캔들, 슈워츠(Schwartz), 제셀(Jessell)이 공동집필한 『신경과학의 원리(Principles of Neural Science)』는 “세계가 직접, 정확한 상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지각은 착각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영국의 저명한 신경과학자인 크리스 프리스(Chris Frith) 역시 『마음 먹기(Making Up The Mind)』라는 저서에서 “우리의 세계 지각은 환상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가 착각이나 환상이라면 사람은 “세계에 접근”할 수도, “세계를 이용”할 수도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불가지론의 허구성은 여실히 폭로된다. 간단히 말해 만일 인류가 세계를 인식할 수 없었다면 세계를 개조하고 역사를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불가지론의 아류인 “거대한 착각 가설은 틀린 철학이므로, 그것을 옹호하는 증거를 제공한다는 인지과학은 틀린 과학이다.” 비록 인지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사람의 기억력이나 지각능력의 결함을 반복해 증명한다고 해도 사람의 인식능력을 극단적으로 폄하하는 인지과학의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험실에서나 극장에서나 속기 쉽다는 사실은 다만 우리의 인지력 발휘가 맥락에 의해 제한됨을 드러낼 뿐이지 우리의 인지력이 근본적으로 착각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연 심리학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생물학주의, 환원주의, 실험맹신주의, 불가지론 따위가 지배하는 무지몽매의 길일까? 아니면 사람에게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주는 진리의 길일까?
전자의 길로 나아간다면 심리학에 미래는 없다. 나는 과거에 “설혹 생리심리학자들이 ‘뇌 지도’를 완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은 ‘늑대소년’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알바 노에 역시 “주류 신경과학이 당연시해온 의식의 본질에 관한 가정들에 우리가 지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의식에 관한 이론화의 숲에서 우리는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일 것이라고 경고한다.
심리학은 반드시 후자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저자의 단순하고도 명쾌한 질문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세계를 포함할 가능성은 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심리학은 뇌와 실험실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뇌 말고도 더 커다란 몸, 그리고 우리 자신이 처한 환경과 관련해서 뇌가 하는 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최고의 새로운 과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몸과 세계를 포함해서 자신을 파악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심리학자들이 강제로 사람을 세계로부터 분리하고 사람을 뇌 안에 가두어두려고 시도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사회역사 속에서 의연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학문이라는 미명하에 인위적으로 왜곡할 수 없는 진짜 현실이다.
심리학이 인문학적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현실을 왜곡 없이 직시하기 시작할 때, 심리학은 비로소 올바른 과학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뇌, 몸, 세계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형성한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다.”
그렇다. 사람은 결코 뇌나 동물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 속의 존재이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이해는 오직 사람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할 때에만 가능”(『스키너의 심리상자 닫기』, 173쪽)하다.
나는 미국의 주류적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학자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면서 『스키너의 심리상자 닫기』의 핵심 주장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다.
“심리학의 미래는 결코 생물학주의나 실험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심리학이 생물학주의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인문학적 전통을 회복하고, 동물실험이 아니라 인류가 창조한 역사와 문학, 예술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자각을 가지며, 사람을 전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확고한 입장을 확립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또 하나.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다’라는 상식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가 더해질 때, 심리학의 미래는 밝게 빛날 것이다.”
http://blog.daum.net/wldms59/17128563 저는 다시 만들어진 신 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환원주의의 한계를 돌파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환원주의는 펙트와 사건 만을 다루기에 fact와 fact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사이, 관계, 창조성을 다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완전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뭔가를 알려고 한다면 두리 뭉실하여 죽도 밥도 아닌 접근보다는 탁월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 허기라는 고통과 먹는 즐거움이 큰 역할을 합니다
먹는 즐거움을 구성하는 맛은 5가지 뿐이고 향은 375~400종 정도가 전부입니다
3000만종의 화합물중에서 코에 있는 400 종류의 후각세포에 반응하는 물질만 향이고
30여종 미각세포에 반응하는 물질만 맛이니 극히 일부인 셈입니다.
이 물질은 단지 감각세포의 수용체(GPCR)에 결합하여 전기적 신호만 만들뿐이니
결국 맛과 향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뇌가 만든 환각인 셈이지요
이 맛과 향의 인식 기작에 마음을 집어 넣으면 정말 이상해집니다.
하지만, 단지 뇌가 만들어준 환각에 불과한 맛과 향에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유일한 즐거움이기도 하고 ...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허기의 고통을 덜거나, 먹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상이지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항상 팩트는 단순한 것 같습니다. 맛은 불과 5가지, 향은 400종,
그 물질이 감각세포를 활성화 시키면 결국 뇌의 특정부위에 연결되고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면 쾌감으로 보상하고 불리하면 고통으로 응징하고 ...
하지만 이 단순함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한대의 맛과 음식의 종류와 역사 그리고 희노애락
단순한 팩트와 사건이 무한대의 경우의 수를 만드는 역동적인 창조성
이 창조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환원주의식 접근에 한계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오해와 편견으로 짜맞추면 Franken knowledge
아무리 열심히 짜맞추어도 전모를 말해주지 않는 2차원적 설명들
원래 세상은 3차원 적으로 연결되 있고, 이것의 지식도 3차원적 일것인데
정리된 평면적 설명 가지고는 도저히 전모를 알기가 힘들지요
팩트와 사건을 외우고 끝까지 파고들다 보면
스물스물 머리 속에서 3차원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하고
슬슬 느낌이 와 닿는 것이 환원주의를 극복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고
우리의 뇌의 창조적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철학은 하시되
정직하게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축적된 지식을 우선 공부하는게
무지를 덮는 성급한 윤리학 보다는
더 윤리적인 배움을 얻게 될거라고 짐작됩니다.
과학으로 성급한 신념을 다스리기. 이 책의 저자도 바라는 바일듯 하네요.
딜레마에 빠지신 궁금이님을 못 본척 할 수 없어 제 의견을 드립니다.
궁금이님이 조금 더 박자세의 자연과학 공부 방법과 원칙을 심사숙고하시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로 박자세가 진행하는 자연과학 공부의 프레임을 유심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박자세는 137억년 우주진화에서 뇌 생각의 출현까지의 스펙트럼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는 공부를 합니다.
인간의 뇌가 벌이는 현상을 비롯한 생명현상도 역시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맥락에서 생명현상을 비롯한 인간현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 인간의 뇌에 의해 해석된 현상과 그 현상의 기반인 생리적 작용, 물질적 물리적 토대를 공부하지 않으면 인간현상을 대표하는 뇌의 작용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고 쓸데없는 논쟁의 미로에 빠지게 됩니다.
박자세는 137억년 우주진화란 강의를 통해서 우주의 시공과 물질이 생겨나고 작용하는 물리적 기초를 공부하고, 물질과 시공을 토대로 생명이 출현한 과정을 공부하며, 생명의 작용의 기초가 되는 세포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주론, 천체물리학, 천문학, 역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열역학, 지구과학, 진화학, 유전학, 분자생물학, 생물학, 세포생물학, 생화학에 관한 기초지식을 공부합니다.
이런 기본지식을 토대로 인간현상의 이해를 위한 특별한 뇌과학이란 강의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뇌란 물질덩어리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에 매진합니다.
특별한 뇌과학의 과정에서 뇌의 현상과 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가 되는 뇌의 구조와 진화, 분자생물학 관점에서의 뇌의 생리적 작용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뇌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자연의 일부로서 뇌란 물질은 원래 구별없이 자연과 죽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연과 분리된 인간현상이 별도로 독립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뇌가 벌이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자연에는 어떤 현상이 존재하는 이면에는 반드시 그 현상의 기반이 되는 물질적인 토대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토대가 없이 현상만 따로 존재할 수 있나요?
박문호박사님이 잘 드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통혼잡 현상은 자동차란 물질을 기반으로 도시의 길위에 출퇴근시간이라는 시공간을 토대로 나타나는 복잡성 현상입니다. 물론 복잡계 및 복합계적 현상도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다만 그 기반이 되는 물질적인 토대가 없으면 이런 현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뇌가 주변환경과 시공간과 상호작용하여 유발하는 복합계적 현상(마음과 생각)과 그 기반인 물질적인 토대(신경세포 뇌조직)는 분명히 다릅니다.
뇌과학과 신경과학은 이처럼 물질적 기반과 복합계적 현상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지를 이해하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심리학과 인지과학 철학, 종교라는 분야는 복합계 현상에만 주목하여 현상을 현상에 의존하거나 심지어 현상이 물질적 토대를 결정한다는 견해를 토대로 해답을 구하는 과정이어서 쉽사리 해답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그대로 복합계 현상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여 겉으로 드러난 현상입니다. 모든 복합적인 인과관계를 밝히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물질적, 생리적 작용을 기반으로 복합계적 현상인 생각, 마음, 문화란 인간현상을 이해해야하는 당위적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박자세의 137억년 우주진화, 특별한 뇌과학은 참으로 뛰어난 프레임입니다.
뇌과학의 앞에 "특별한" 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도 바로 이런 관점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둘째로 박자세가 추구하는 교과서 주의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믿을만하고 검증된 지식의 체계를 집대성한 책이 바로 교과서입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전문가이든 입문자이든 교과서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서 기초지식과 정보를 형성해야 합니다.
적어도 교과서는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그 나라의 문화적 철학적 이념적 배경과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검증된 지식체계라고 인정하여 범 공동체적 합의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재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에 실린 지식은 수십년 또는 수백년간 수만명의 과학자들에 의해 비판과 검증의 과정을 거칩니다.
물론 교과서에 실린 지식이라도 향후 연구에 따라서 수정을 하여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확률적으로 오류가 가장 적은 책이 교과서라고 평가하는게 타당합니다.
교과서가 아닌 단행본은 저자의 입맛대로 서술된 검증된 지식 체계가 아닌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저자 개인적인 철학적 종교적 문화적 심리적 견해를 기반으로 사실왜곡에 그치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독자나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런 책을 자연을 이해하는 기초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행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유형의 책의 내용을 가지고 토론하거나 완벽한 해답을 구하거나 이해 할려고 하면 시간낭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과서를 통해서 기본지식 프레임을 형성하고 그 분야의 대가로 인정받은 사람이 저술한 단행본을 통해서 배경이 되는 지식을 더 자세하게 흡수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좋은 공부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를 통해서 기본지식과 프레임이 형성되고 나면 이런 유형의 단행본들의 진가를 금방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궁금이 님에게 필요한 것은 뇌의 작용에 관한 완벽한 이해보다는 교과서를 통한 뇌과학 및 신경과학의 기본지식과 프레임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이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오프라인 특별한 뇌과학 강의에 참석해서 기존 회원님들의 의견을 들어 보세요.
곤충을 삼 등분 하면 ? 머리, 가슴,배.아니다. 죽는다.
생명은, 존재함은 어느 한 기관의 작용에 의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생명현상은 유기체의 유기적 질서 속에서 발현한다.우리 몸은 10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있다. 대뇌피질을 구성하는 신경세포는 약 1000억개 정도) 이들간의 상호 유기적 작용을 한눈에 모두 볼 수 있다면, 온 우주공간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한꺼번에 바라보는 느낌일까.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살고 , 감각의 한계 또한 분명하여, 극대와 극소를 알기 어려운 생명체다.
그럼에도 현생 인류 출현 10만년 이후 끊임없이 인류는 자신 앞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자연에 대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자 하였다. 인간의 지적 역사속에서 ,우주 137억년 영겁의 역사가 사유되고,그 안에서의 생명체간의 관계가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시공속에서 어느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해온 것은 없었다. 사회역사가 배제되었네.. 어쩌네가 아니라, 우리가 우주 역사 속 상호작용의 산물임을 우리는 기본적으로 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무수한 존재들이 명멸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기나긴 생명체 역사의 블랙박스가 유전자에 보관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 님 침스키는 인간의 가정에 입양 되어 인간으로 양육 되어도 인간이 될 수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감각의 한계를 확장 시키고,그러므로서 사유의 한계를 밀어 부친다. 어떻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활용하여...인간이 할 수있는 것은 셀수있는 것 뿐이라고, 하나 하나 카운트 하는 일뿐이라고, 이것이 과학의 자세라고 배운 바 있다. 현상계(복잡게든 복합계든)를 한조각 베어 내어 하나 하나 풀어서 헤아려 보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는 근본원리는 무엇이며 이 원리를 적용하여 이것들이 일으키는 현상계을 알 수있고 예측 할수 있는가, 나아가 우주 전체를 이루는 기본 청사진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환원주의라면 다시 재구성 되어짐을 이해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뇌 신경세포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들이 무슨일을 하는 지는 보면 알수있다.
신경핵,신경전달물질은 독자적으로 자극되어 일을 벌리진 못한다.신경회로에 대한 기본적 개념만으로도 우리는 이것을 논쟁의 대상으로도 삼지않는다.복잡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눈이 없거나, 시신경중추가 망가지면 우리는 볼수없다.
운동신경회로가 망가지면 움직일 수 없고, 도파민이 부족하면 정상적인 자연스런 운동을 할 수없으며, 세로토닌 분비가 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린다. 인간은 망가진다.
고유감각이 없어지면,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다(' 몸이 없는 크리스티나' 가 된다.). 한 부분의 감각이 망가져도 우리 인식은 타격을 받고 만다. 뇌 자체가 인격체이거나 주체자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바보는 드물지 않을까
몸이라는 소우주의 사령탑 업무를 맡아 생명체가 고유기능을 유지 할 수있도록 조절해주고 있는 기관일뿐이다. 심장도 , 손톱 밑의 종기 하나도 생명 전체를 위협할수있다.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상호 유기적 작용하에 역동적인 에너지의 흐름이 생명현상이라고 말 할수도 있다 .마음의 경계를 뇌에 국한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런게 바로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가 싶다.
에너지계의 역동적 흐름속에서 무슨 경계가 이리 많은걸까.
컴퓨터와 인간뇌의 비교는 너무 성급하다. 인체와 기계의 비교는 급수가 되지않는다.
진화학적 개념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지...인정하지않는 건지...
인간의 뇌와 같은 컴퓨터를 만들 수 있고, 인간의 몸과 같은 기계를 만들수있다면.
이 기계는 정신 이라는 사고 작용을 할 수있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 문화를 만들것이고,예술 ,종교 철학,과학등등.. 우리가 할 수있는 것 모두를...
나무 하나의 속성과 숲이 보여 주는 속성( 현상)은 다르다.
하나의 뇌 세포와 뇌가 보여 주는 현상은 다르다. 그러나,
뇌가 죽으면, 인간의 정신도 없다. 아니라면 어디에서 정신을 찾을 수 있을까.
간만에 뇌가 열심히 생각하게 해주는군요^^
마음이나 세계, 세계관이라는 말의 권위와 고상함에 경도되는 것은 문제가 있고..
뇌활동이라는 말이 환원적이라고, 저열하다고 느끼는 것도..그 말 자체, 언어의 함정이라고 보입니다.
뇌과학 공부를 통해 인간현상을 단순화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마음(?)'의 경이로움에 빠져드는, 그 혼란으로 즐겁게 빠지는 경험아닐까요.. 저는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낍니다.
뇌의 신경지도가 다 완성되어도 뇌의 신비는 계속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렇고.
여튼 '언어의 감옥'에 빠지는 논쟁들은 소모적이에요.
가을비.. 좋은 밤입니다.
궁금이님이 올리신 글을 보고
간단히 하나만 되 묻고 싶어 지네요
우리 주변에 노화와 더불어 흔한 현상이 되었지요,
치매는 뇌가 퇴화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이성적 사고를 떠나
마음적 사고를 할 수 있나요.